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드라마의 핵심 서사로 기능해 왔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가족의 형태와 가치, 갈등의 방식 또한 달라졌습니다. 전통적인 혈연 중심의 가족에서 확장 가족, 선택 가족, 해체된 가족에 이르기까지, 드라마 속 가족 서사는 보다 다층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대표적 사례를 통해 드라마 속 가족 서사의 변화 양상과 그 사회적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족, 언제나 중심에 있었던 이야기
드라마가 시대의 거울이라면, 그 속에서 가장 자주 비추어진 것은 ‘가족’입니다. 가족은 인간의 가장 가까운 관계이자, 가장 복잡한 감정이 얽히는 장치로서, 수십 년간 드라마 서사의 근간이 되어왔습니다. 1980~90년대의 한국 드라마는 특히 가족 중심 서사에 집중하며,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고부갈등 등 전통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랑이 뭐길래》, 《보고 또 보고》, 《엄마의 바다》 같은 드라마들은 부모의 희생, 자식의 성장, 며느리의 인내 등 ‘가족 안에서의 도리와 갈등’을 반복적으로 조명했습니다. 이 시기의 드라마는 ‘가족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공동체’라는 전제를 공유하며, 가족 간의 갈등이 있더라도 결국은 화해와 용서를 통해 결말을 맺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서사는 일직선형이었고, 구성원 간의 관계도 비교적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장남은 희생해야 했고, 어머니는 헌신적이어야 하며, 며느리는 이해심이 깊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를 거치며 가족의 구성과 가치관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희생을 감내해야만 하는 가족'이 아니라, 개인의 행복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서사가 바뀌었으며, 이는 곧 드라마의 스토리라인과 인물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가족은 혈연뿐 아니라 선택과 상황에 따라 형성되는 관계로 확장되었고, 드라마는 그 다양한 형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정상 가족'이라는 기준이 이야기의 전제가 아니며, 오히려 ‘불완전한 가족’이 더 큰 감정적 울림을 주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드라마 속 가족 서사는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드라마가 보여준 가족의 새로운 얼굴들
드라마 속 가족 서사의 변화는 그 구조와 갈등 방식, 그리고 감정의 표현 양식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먼저 가족 구성원의 다양화가 대표적인 흐름입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드라마가 아버지, 어머니, 자녀라는 전형적인 핵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오늘날의 드라마는 편부모 가정, 재혼가정, 비혈연 가족 등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는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 해체되거나 기능을 상실한 현대 사회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주인공 박동훈(이선균 분)은 가족이 있지만, 구성원 간의 정서적 단절을 겪고 있으며, 오히려 낯선 존재인 이지안(이지은 분)과의 관계를 통해 위로를 받습니다. 이는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혈연 외적 관계에서의 감정적 연대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선택 가족’ 개념을 제시합니다. 또한 《우리들의 블루스》(2022)는 다채로운 가족 구성을 한 편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아내며, 한부모 가정, 노년 부부, 장애인 가족, 청소년 부모 등 현실적인 가족 문제를 섬세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이 드라마는 각기 다른 가족 형태가 겪는 고유한 갈등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이해와 수용의 과정을 통해, ‘정상 가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시대적 산물인지 조명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가족 간의 갈등도 변화했습니다. 과거 드라마가 외도, 유산, 장남 문제, 고부갈등 등 제도와 의무 중심의 갈등에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감정의 이해 부족, 심리적 거리, 개인의 자율성 등 보다 내면적이고 섬세한 갈등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족 내 감정 노동’이라는 주제를 부각하며, 갈등 자체보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를 중심 서사로 삼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드라마는 이제 가족을 고정된 구조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형성되는 관계로 그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시청자에게 가족이라는 관계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각자의 경험을 투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동시에 감정적으로 더 깊은 울림을 주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드라마에서 만나는 가족
드라마 속 가족은 더 이상 이상적인 공동체의 상징이 아닙니다. 오히려 결핍되고 깨지고 재조합된 가족이 더 많은 공감을 얻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의 가치관과 인식 변화가 콘텐츠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이제 드라마는 ‘가족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 ‘가족이기 때문에 가능한 감정의 깊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탐색하고 있습니다. 류준열이 출연한 《응답하라 1988》은 과거형 가족의 따뜻한 기억을 소환하면서도, 세대 간의 미묘한 거리와 변화하는 가치관을 담아냈고, 이병헌이 주연한 《우리들의 블루스》는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연인으로서 상처받고 성장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가족 안에서 겪는 감정의 복잡성을 진지하게 다뤘습니다. 드라마 속 가족 서사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집니다. 가족은 주어진 관계가 아니라, 이해하고 선택하며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관계라는 것. 그 안에는 갈등도 있고 화해도 있으며, 가장 보편적인 동시에 가장 개인적인 감정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 가족을 그리는 방식이 진화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이 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드라마는 그 과정을 기록하고, 시청자는 그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되짚어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짜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