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1994년 서울을 배경으로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14살 소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감정의 기록입니다. 가족, 학교, 사회로부터 오는 억압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내면을 섬세하고 조용한 시선으로 그려낸 이 영화는, 작고 사적인 성장의 이야기가 어떻게 보편적 울림을 가지는지 보여줍니다.
사춘기의 진동을 들여다보다 – ‘벌새’가 우리에게 남기는 감정의 결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2018년 개봉 당시 수많은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한국 독립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거대한 사건이나 극적인 전개 없이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감정의 흐름을 정교하게 포착해 내며 ‘정서적 밀도’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체감하게 합니다. 주인공 은희(박지후 분)는 중학교 2학년 여학생입니다. 1994년 서울, 성수대교 붕괴 전후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은희는 가족의 무관심, 학교의 위계, 친구와의 갈등, 첫 연애, 질병과 죽음 등을 혼란스럽고도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 영화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눈빛과 침묵, 긴 정적 속에서 인물의 감정이 잔잔하게 흘러나오며 관객의 감정 역시 함께 흔들립니다. <벌새>는 사춘기의 한 시기를 거대한 의미나 교훈 없이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기록합니다. 그 결과, 이 영화는 한 사람의 기억이 어떻게 역사와 교차하며, 사회와 만나고, 결국 자신만의 목소리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1. 은희의 세계 – 소녀는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은희는 겉보기에는 평범한 중학생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고요하지만 깊은 균열이 존재합니다. 가족 안에서는 늘 뒷전이고, 폭력적인 오빠와 권위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그의 존재는 투명에 가깝습니다. 어머니조차 은희에게 진심 어린 대화를 시도하지 않으며, 그녀는 늘 '혼자'입니다. 학교는 또 다른 억압의 공간입니다. 교사의 체벌, 친구들과의 불안정한 관계, 늘 시험과 비교되는 일상 속에서 은희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을 향한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왜 가족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왜 어른들은 항상 옳은가? 왜 나는 이토록 외로운가? 그녀의 일기, 손글씨, 그리고 무엇보다도 긴 침묵 속에서 우리는 그녀가 얼마나 무겁고 조용히 세상과 충돌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은희는 단지 피해자나 소외된 존재가 아닙니다. 그녀는 끊임없이 느끼고, 생각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작은 존재이자 하나의 우주입니다.
2. 영지 선생님 – 삶에 처음 도착한 온기
은희의 삶에 큰 전환점을 만들어주는 인물은 바로 한문 학원에서 만난 영지 선생님(김새벽 분)입니다. 영지는 은희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이며, 질문을 던지고 기다려주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며, '그럴 수도 있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입니다. 은희는 이 만남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며, 누군가는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관계를 이상화하거나 과장하지 않습니다. 영지는 결국 은희 곁을 떠나지만, 그 존재가 은희에게 남긴 울림은 오래도록 그녀의 삶에 스며들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사춘기 어딘가에서 영지 같은 존재를 원합니다. 그 사람이 스쳐 지나가더라도, 그 짧은 만남이 우리를 지탱해 주는 기억이 되듯이 말입니다.
3. 세상의 무게와 맞서는 방법 – 말없이, 그러나 분명히
<벌새>는 은희의 이야기이자, 한 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성수대교 붕괴는 영화 속에서 큰 사건처럼 다뤄지지 않지만, 그 사건은 '세상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은희의 감정과 마주합니다. 은희는 아프고, 배신당하고, 사랑받지 못한 채 방치되지만 무너지지 않습니다. 말없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견디고, 살아냅니다. 이 영화가 감동적인 이유는 은희가 위대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감정과 상처를 있는 그대로 견뎌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큰 사건으로, 누군가는 작은 변화로 성장하지만 모든 성장은 그 자체로 의미 있습니다. ‘벌새’는 작고, 약하고, 조용한 존재지만 그 날갯짓은 의외로 강하고, 멀리 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섬세하게 말해줍니다.
작고 진한 떨림 – 기억이라는 이름의 영화
<벌새>는 쉽게 소비되는 성장 영화가 아닙니다. 말이 없고, 큰 소리도 없으며, 드라마틱한 반전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우리가 지나온 사춘기의 감정과 그 미세한 떨림들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포착해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필자를 비롯한 우린 모두 사춘기라는 열병을 앓고 있고, 또 앓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히 지나가는 사춘기의 열병이 아니라 특히 여성의 성장서사, 감정의 복잡성,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억눌려온 구조들을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흔히 얘기하는 페미니즘 색을 선명하게 드러냈지만 남녀를 가리지 않고 좋은 평을 받았고, 90년대의 분위기 재현도 잘 표현했고 여학생이라는 좁은 시야에 비춰지는 세상에 대한 묘사와 그 너머에 대한 관심을 세심하게 그려냈습니다. 우리가 벌새처럼 작고 연약했던 시절, 그러나 누구보다 세상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던 그 순간들을 ‘벌새’는 영화라는 언어로 다시 꺼내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